지적허영과 자존심
살면서 스치듯 들었던 이야기가 궤적을 바꾸기도 한다. 누구에게서 언제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친척중에, 수재소리를 듣던 삼촌이 한분 계셨다. 한국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유학도 흔하지 않던 때에 미국으로 넘어가 명문대학에서 생명공학으로 박사를 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 일이라는게 꼭 실력만으로 풀리는 것은 아닌지라, 한국에 돌아와 뜻대로 교수 임용이 되지 않으셨단다. 당시 생명공학은 조금 이르고 생소한 분야였기도 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안풀린것은 아니였다. 지방대학들에서는 교수 오퍼가 들어왔다. 문제는 삼촌분의 잘못된 관점이었다. 나같은 사람이 지방에서 대학교수로 시작하는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며 모든 오퍼를 거절하고 계속해서 서울 명문대학교의 교수직만 기다리시다가 때를 놓쳤다. 지방대학 오퍼들 마져도 결국은 사라졌다.
그 이후로도 퍽 오랜시간 과거의 영광과 지적허영심에 갇혀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결혼도 시기를 놓치게 되었고 변변한 직업 없이 전전긍긍 했다고 한다. 무슨 일이라도 밥벌이를 위해 도전하기에는 자신은 너무 수재였고 대단한 일을 할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해야할 일도 “교수,” “학자” 로 너무 제한 하고 있었다. 다른 시도는 하지 않았다.
결국은 50이 넘어서도 노모의 집에서 게임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슬픈 결말로 이야기는 마무리 되었다.
어린 마음에 그 이야기를 듣는데, 내가 그렇게 될까봐 무척이나 두려웠던 기억이 난다.
우연찮게 듣게된 이 짧은 스토리는 나로 하여금 지적인 허영심과 자존심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의외로 자주 주의하게 했다.
아무리 훌륭한 대의가 있더라도, 자신과 자신의 가족은 먹여 살릴수 있는 책임감이나 노력위에 명분을 세워야 한다는. 어떻게 보면 현실적인 인간이 되는데 이 작은 스토리가 큰 역할을 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나는 수재 소리를 듣진 않았지만, 여차저차 미국에서 박사를 했고, 그 삼촌과 똑같이 노총각이 되었다.
다행히 그 짧은 스토리 하나 떄문에 꿈과 이상에 빠져서 허우적 대지 않고 현실에 발바닥을 딱 붙이고 서 있다.
그리고 점점 시간이 갈수록, 무슨 일을 하건, 책임감있게 가족을 먹여살리려 닥치는대로 분투하고 일하시는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을 존경하게 된다.
이것 가리고 저것 가리는건.. 아직 덜컸다는 증거같다. 사랑하고 지킬 것들이 있는 사람은 그런 허세를 부릴 겨를이 없다.
그 삼촌은 요즘 어떻게 살고 계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