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신학

인내심

4christ 2022. 1. 23. 14:38

성경은 인내를 자주 언급한다. 신약만 살펴보아도 인내를 언급할 뿐 아니라 가치 있게 여기는 성경구절이 많다. (롬 2:7, 8:25; 고후 6:6, 12:12; 갈 5:22; 엡 4:2; 골 1:11, 3:12; 딤전 1:16; 딤후 3:10, 4:2; 히 6:12; 약 5:10; 벧전 3:20; 벧후 3:15) 모든 것이 사라져도 남는 세 가지를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말씀하는데 (고전 13:13), 그중 제일인 사랑을 이루고, 유지하고, 완성하는 것도 "오래 참음"이다. (고전 13:4) 끝까지 견뎌 인내하는 자는 영혼의 "구원"을 이룰 것이라고도 하신다. (마 24:13; 눅 21:19) 인내는 이 두가지만 생각해 보더라도 보통의 가치가 아니다. 잠깐의 인생을 살면서 사랑과 영혼의 구원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어느 누가 자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만큼 중요한 두 가지 언저리에는 인내가 기웃거리고 있다. 인내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하지만, 말세가 이르렀기 때문인지. 현대문화에 비춰본 오래 참음은 이제 무가치하게 느껴진다. 연약하고, 무력하고, 쓸데없다. 무엇보다 수동적이다. 현대는 이제 자긍 하고, 교만하고, 훼방적이고, 절제하지 못해 조급하며 사납다. 또 그래서 쟁취하고, 표현하고, 드러내고, 다투며, 급하고 바쁘다. 참지 못하고 사방으로 발산되는 에너지를 이제는 카리스마니, 추진력이니, 성취지향성이니 하는 말로 포장하고 부추긴다. 오래 참는 이는 바보이자 손해 보는 이 일 뿐이다. 내가 성공하고 내 안위를 먼저 두어야 하고 내가 도드라 져야 하는데 어느 세월에 오래 참고 남을 위해 또 하나님을 위해 인내하겠는가. (결국은 자신을 위한 인내임에도, 타자를 위해 인내를 "해준다"라고 생색을 낸다) 

 

존재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종교를 만들고 이를 적용/의지하다 만들어진 by-product로서의 고리타분한 가치의 합이 성경이라면 그 성경이 아름답게 비춰내고 있는 인내라는 가치도 함께 묶어 묵과해도 좋겠다. 하지만 역사 속 그리스도는 분명히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성경은 여전히 진리임을 심리,사회,철학 및 과학과 의학 따위의 것들을 통해 점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꼭 이런 실증적인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주 하시는 성령과 함께 보여준 기독교 역사에 수많은 증인들을 통해서라도. 지독하게 미련하고 이기적인 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는 어이없는 사실만 생각해보아도. 말씀은 제 자신이 진리임을 몸부림치며 여전히 드러내고 있다.   

 

삶의 모든 영역이 그렇겠지만. 말씀이 사실이라면. 인내를 더 묵상하고, 더 적용해 날카롭게 다듬어야 할 명분은 차고 넘친다. 인내는 온유하게 무대 뒤편에 서있는 주연이다. 삶을 윤택하게 해줄 최고의 러닝 메이트이기도 하다. 이 짧은 글을 쓰면서도 의식이 사방으로 튀고 엉덩이를 들썩이는 조급하고 꼴 보기 싫은 자신의 가벼움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인내는 더욱 완전한 가치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