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는 누구나 순교한다
늘 백 마디 말보다 한 뼘의 실천이 어렵다. 말로는 다수가 순교를 하고, 어려움을 극복하지만, 정작 어려움이 실제가 되면 또 다른 문제가 된다. 김동호 목사님이었을 거다. 지금까지 죽음에 “대해” 떠들었을 뿐 죽음이 실제가 되었을 때 비로소 죽음의 문제에 준비되어 있지 않은 자신을 직면하게 되었다고. 그런 의미에서 어려움은 내가 떠벌이인지 실제 하는 믿음을 가진 자인지 측정해주는 리트머스지다. 신앙은 따듯한 커피숍에 앉아 하나님을 말할 때가 아닌 고통의 뒹굶 속에 비로소 얼굴을 내민다. 전자는 말에 쌓인 허상이고 후자는 알맹이다. 진실이 속히 까발려지는 게 좋을 수도 있다. 떠벌이었다면 겸손하게 믿음의 은혜를 구하게 되고, 고난 중에 평안이 있다면 이 또한 내주 하신 성령의 일하심일 뿐이니 다시 겸손해지고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어차피 인간에게는 어려움과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자원이 애초에 없다. 성경에 졸장부와 한심한 이들이 많은 이유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들어 쓰셔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실 그게 인간의 민낯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위인들도 위인전으로 혹은 먼발치에서 바라봤기 때문에 미화될 뿐 가까이 지내보면 이들 또한 문제 많고 성격 안 좋은 한낱 인간이다. 그러니 벌벌 떨더라도 하나님 바짓가랑이 붙잡으면서 그리스도의 평안과 용기의 영이 임하기를 간구하는 수밖에 없다. 멋있고 거룩하고 훌륭한 건 하나님이 주시는 열매를 통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접붙인 바 된 삐죽하고 마른, 앙상한 가지일 뿐이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왜 나한테만 이러세요” 불평하고 짜증 낼 일이 아니라, 어쩌면 특별관리받고 있음을 인지하고 감사로 전환시켜보는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