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겸손, 약자의 벗
사람은 "큰 것"을 좋아한다. 무엇이건 대형이면 일단 호기심이 동한다. 소속되고 싶고 관심이 생긴다. 유명한 곳, 유명한 것, 유명인과는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려 한다. 때로 내가 그 이가 되고 싶기도 하며, 중심축 언저리라도 서기를 기대한다.
예수는 말 구유에 누이셨다. 여관방 수준도 이르지 못했다. 왕이 행차하셨지만 등장은 가축우리만큼 흔하고 보잘것 없었다. 당시 아구스도의 영광과 극명히 대조되는 모습으로 왕이 나셨다. 마구간과 구유는 예수의 고난과 겸손을 예표한다.
예수, 구원자가 우리를 위해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복음이라 한다. 이 귀한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집단은 독특하게도 목자들이었다. 당시 목자들은 유대문화에서 가장 천대받는 이들 이었다. 율법으로는 부정한 자들이었고, 신뢰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사회적 천민에게, 약자에게 복음은 가장 "먼저" 전해졌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속에는 그 타이틀을 가진 이들이 예수의 정체성을 지닌다는 의미가 내포된다. 예수의 정체성은 약하고 천한 이들의 벗, 고난, 그리고 겸손이 진하게 배어 있다. 분명 그리스도인이라는 타이틀은 많은데, 여전히 한 획을 그어보려는, 화려해지려는 그리스도인들로 넘친다. 대형교회 예배자 자리에는 경쟁이 치열하지만, 중보기도 모임이나 섬김의 자리는 늘 한산하다.
어떤 지혜로운 이가 말했다. 천국에서 가장 놀랄 일중 하나는, 내가 알던 유명인과 무명인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라고 했다. 이 땅에서 너무 나팔 불지 말자. 이 땅에서 너무 주목받으려 하지 말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1세기나 지금이나 달리진 것이 없다. 고난, 겸손, 약자의 벗. 고난, 겸손, 약자의 벗.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묵묵히 기쁨으로 빛도 이름도 없는 곳으로 가자. 예수의 정체성을 입자. 예수가 보고 계시고, 그분이 기뻐하시는데 안알아 준다 억울해 말자. 빛이신 예수의 관심이 머무는 그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다.